나는 왜 나여야만 할까 인문학은 왜 김갑수여야만 할까
Book III. Literature 볼륨배지시즌배지

Written by 김갑수  고유주소 시즌2 / Vol.22(상) 브랜드 인문학 (2011년 11월 발행)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나는 김갑수 선생이 쓴 에세이집인 《나는 왜 나여야만 할까》를 단 하루 만에 쭉 읽어 내려갔다. 혼란한 시대를 자유자재로 읽어대며 자신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인이라고 부르짖는 그와의 인터뷰가 기대되었던 건 사실이지만, 이 책을 읽으려던 소기의 목적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나는 김갑수 선생을 소개할 때 이름 뒤에 어떤 호칭을 붙여야 할까를 두고 한참 동안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다. 분명 시인으로 시작했는데, 오히려 사람들은 그를 클래식 음악의 전문가로 알고 있다(유니타스브랜드가 그를 처음 만난 것도 그가 음악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는 강연장이었다). 문화비평가로 많은 글을 썼지만 정작 라디오 프로그램의 ‘DJ와 인문학 열전’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더 많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그의 작업실에 들어가면 경계가 더 모호해진다. 어디서부터 셈을 시작해야 할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수백만 장이 넘는 클래식 LP판이 사방을 빼곡히 채우고 있고, 150년 전에 사용되었다는 서너 개의 커피밀을 비롯한 다양한 커피밀들이 주방을 수놓고 있다. 벽에 걸려 있는 그림들로 시선을 돌리면 설명해주지 않으면 도저히 그 메시지를 읽기 힘든 현대적 이미지들이라 오히려 클래식으로부터는 거리가 더 멀어진다. 인터뷰 도중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받은 후에 끊으면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친군데, 맨날 전화하는데도 나는 맨날 누군지 모르니, 허허허. (휴대폰에 전화번호를) 저장을 잘 안 해. 아직 습관이 안 되었어. 그런데 휴대폰에 스무 명 이상(의 전화번호가) 저장되면, 너무 징그러운 거 아녜요? 그러고는 살 수가 없어, 하하하.”나는 이 말들을 듣고 그제야 김갑수 선생이 ‘시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먼저 김갑수 시인의 시 한 편을 감상해 보자. 인터뷰를 하는 도중 또 시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너무 열심히 얘기해서 정신이 어질어질합니다.” 정말로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로 인터뷰를 했다. 두 번에 걸친 인터뷰를 합친다면 약 5시간 동안 우리는 인문학과 브랜드의 접점을 이야기했다. 오랫동안 KTV에서 방송되는 ‘인문학 열전’을 진행하며 우리나라 인문학 계보의 리더 수십여 명과 인터뷰를 한 분답게, 그는 인문학에 관한 공인된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수많은 인문학의 정의와 현실, 그리고 가치에 대해 논하며 나름대로 분별의 눈이 생긴 것이리라. 그래서 인문학을 인터뷰하기 위해서는 김갑수여야만 했다. 시적인 정의와 직관적 분석 밑에 지식과 지식의 연결 구조는 클래식 교향곡처럼 템포와 선율로 이어지는 장장 다섯 시간에 걸친 인터뷰였지만, 아쉽게도 여기에 쓴 글은 3막 중 1막에 불과하다.

왜 인문학인가?
Q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디지털 산업의 리더격인 구글에서도 인문학을 전공한 인재들을 대거 채용했다니까요. 우리나라에서는 한마디로 ‘인문학 열풍’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일종의 트렌드일까요, 아니면 사이클일까요?

 




 
A
저도 여러 분야에서 강의를 하는 사람이다 보니 미국이나 유럽의 유수한 대학들의 사이트에 자주 접속합니다. 강의 커리큘럼을 보기 위함이죠. 그런데 몇 년 전부터 하버드 대학을 비롯하여 대다수의 대학에서 전공과는 상관없이 항상 커리큘럼에 인문학 강좌가 올라오더군요. 이를 통해 현재 세계적으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추측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질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인문학 열풍 현상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한마디로 얘기하면 ‘결핍’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무언가가 새롭게(?) 등장했다는 것은 항상 어떤 것의 결핍으로부터 초래되는 것이잖아요. 그렇다면 무엇의 결핍일까요? 저는 ‘창의력’이라고 봅니다.
지금 도래한 사회를 과거와 비교할 때 가장 큰 차이가 뭐냐 하면, 바로 하드웨어가 완성된 것입니다. 산업 사회를 간단하게 도식화해서 설명해 보면 하드웨어를 탄탄하게 만들어서 인간의 완력을 극대화시킨 거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산업혁명 이후 인간은 하드웨어를 만들어 인간의 능력을 확대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죠. 그리고는 결국 그것을 완성했습니다. 자, 이제부터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합니다. 튼튼한 공장을 짓고 거기에서 수만 개의 제품들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움직이죠. 그런데 말 그대로 공장에서 판박이처럼 찍어내는 똑같은 것들이 존재하는 시대가 지속되자 인간은 ‘새로운 것’을 갈망 하게 됩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완벽하게 만들어진 하드웨어에서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이때부터 ‘창의성’이라는 화두가 던져지기 시작하죠. 처음에는 개인적인 창의성이 요구되었어요. 그래서 타고난 능력이라든가, 혹은 눈썰미, 감각이 있는 사람들이 각광을 받으며, 그들의 창의성에 의존하게 되었어요. 그러나 이것마저도 인간의 욕망을 채워 주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전체적으로 모두에게 창의성을 요구하는 시대가 벌어지게 된 겁니다. 이때 사람들은 인문학이라는 것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 번 더 질문을 하게 되겠지요. 창의성을 꼭 인문학에서만 배울 수 있는가, 말입니다. 물론,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시 하드웨어로 돌아갑니다. 하드웨어가 완성되고 난 후, 인간은 과거를 반추해보며 하드웨어로 인해 결국은 인간다움을 잃어버리게 되었음을 인식하게 된 겁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하드웨어가 발전하기 전 ‘인간다움’의 원본을 가졌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한 거죠. 인문학을 영어로 쓰면 ‘Humanities’, 그러니까 ‘Humanity’잖아요. 이 용어가 처음으로 생겨난 때가 바로 르네상스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현재, 르네상스 당시의 문학, 예술, 역사 등을 공부하고 연구하며 그곳에서 다시 한번 시작해 보려고 하는 거지요.

 

Q
르네상스도 중세 시대가 막을 내리며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에 가졌던 인간성의 회복을 위한 부흥운동이었잖아요. 현재도 하드웨어의 발전으로 인해 인간다움의 상실을 자각하면서 다시 한 번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바로 인문학 열풍으로 해석될 수 있겠군요. 이른바 ‘신(新)르네상스’라 해도 무방할 듯하네요.

 

A
인간, 나, 주체… 이런 말들이 등장한 게 다름 아닌 *르네상스 시대였죠. 중세 시대는 알고 있다시피 ‘신’이 중심이 되는 시대였어요. 그래서 인간은 신의 권위 아래에 있는 존재였지요. 그런데 중세 시대가 막을 내리자, 인간은 중세 시대 전인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인간성’을 찾아오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입장에서는 중세 시대는 인간의 창의성이 완전히 정지되어 있던 때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중세 시대 이전 인간의 자유로움이 왕성하던 때인 고대에서 진정한 인간을 찾아오려고 한 거였죠. 그러면서 자연스레 인간의 주체성을 연구한 학자들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근대 시대의 서막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인문학을 연구한다, 할 때는 바로 이 시기를 연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고대의 것을 가져와 거기서 야만성을 제거하고 문명 시대에 맞는 인간다움을 완성시킨 학문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어요. 현대의 디지털 문명은 조금 다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거예요. 디지털 문명은 근대적 문명이 가지고 있던 질서, 이성, 법 등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죠. 여기에는 질서가 없어요. 어떤 규칙도 없죠. 모든 것이 혼재되어 있는 공간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이곳은 문명이 건설되기 이전의 시대와 비슷한 환경적 토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디지털 문명을 ‘신(新)야만’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서 인문학을 논할 때는 르네상스 시대가 아닌 정말로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것들을 끌어와서 설명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신화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건, 고대 그리스·로마시대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인문학을 논할 때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나 니체의 철학을 ‘회복’시키자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오늘날의 시대에서 결핍된 부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는 거죠. 그러니까 그때의 생각이나 사상을 레퍼런스로 본다는 겁니다. 과거의 것을 다시 불러와서 그것을 통해 오늘날 당면한 문제들을 분석하고, 해석할 때 과거의 철학들은 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것으로 재탄생되어 결국, 결핍을 메워 주는 정신으로 자리매김되는 겁니다.

* 이 아티클의 전문을 읽으시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1. 현재 유니타스브랜드는 매거북의 모든 기사를 온라인에서 편리하게 보실 수 있는 유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멤버십 안내 페이지 바로가기)

2. 기사는 무료(share) 기사와 유료 기사로 구분되어 있으며 온라인 로그인 시 무료 기사를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3. 무료 기사는 [MAGABOOK > 전체보기]에서 볼륨별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또는 MAGABOOK 메인 페이지에서 '무료 기사 보기'를 이용해 주세요.

4. 이 기사에 대한 PDF는 리디북스(유료)(http://ridibooks.com)에서 만나 보실수 있습니다.

유니타스브랜드 문의

About Us

찾아오시는 길

멤버십 문의

  • 070-5080-3815 / unitasbrand@stunitas.com

교육, 컨설팅, 제휴 문의

  • 070-5080-3800 / ahneunju@stunitas.com

매트릭스 단체, 쇼핑몰 문의

  • 02-333-0628 / momente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