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온 창조적인 인문학자를 만나다

Written by Jean-Charles de Castelbajac  고유주소 시즌2 / Vol.22(하) Vol.22(하) 인문학적 브랜드 (2012년 01월 발행)

내일로 내딛는발걸음 그 길 위에 미래를 바라보며 나의 추억들을 품고 간다. 보석을 든 듯이 나의 죽은 친구들을 품고 간다. 내가 사랑을 추구함에 있어 쟁취하는 것은 베풀기 위함임을. -까스텔바작-

The Interview with 장 샤를 드 까스텔바작(Jean-Charles de Castelbajac)

 

1. 첫 번째 만남

2011년 5월, 드디어(?) 인문학적인 창조자를 만났다. 유니타스브랜드 편집팀이 한창 ‘브랜드와 인문학’이라는 주제로 자료를 모으던 중, 반가운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주변 지인에게 부탁한 지 일주일 만에 온 연락이었다. 지인들에게 혹시 패션 디자이너 중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말을 해둔 적이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우리에게 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현대 직종에서 그를 다시 분류해본다면 해부학자, 식물학자, 도시개발자, 생물학자, 기계공학자, 천문학자, 음악가, 지리학, 발명가 등으로도 부를 수 있다. 한마디로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며 그에 걸맞은 업적까지 남긴 사람이다. 그는 언제나 세상을 관찰하고, 무엇보다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연구하여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내고, 그 이론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설계도를 그려 냈다. 전화기 너머로 지인은 바로, 당신이 찾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패션 디자이너를 찾았노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의 이름은 ‘쟝 샤를 드 까스텔바작(이하 까스텔바작)’이라고 했다. 단번에 입에 붙지 않는 이름이었다. 어쨌든 약속을 정하고 그를 만나 보기로 했다.

 

그를 만나기 전, 구글과 페이스북을 통해 그에 관한 정보를 검색해 보았다. 먼저 사진부터 찾아보았다. 사진 속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보다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 더 가까워 보였다. 패션계에서 활동하는 그의 모습은 한마디로 아방가르드(avant-garde, 전위예술. 실제 의미는 돌격대)적이었다. 하지만 전위적인 패션 스타일보다 더 눈길을 끈 것은 따로 있었다. 그는 패션 디자이너로서보다는 소설가, 작사가, 설치 예술가, 무대감독, 뮤지컬 디렉터, 잡화 디자이너 등 전부 열거하기에도 바쁠 정도로 다방면에서 창조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이었다. 42년간 펼쳐 온 그의 창작 활동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1997년 그의 나이 47세 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예복을 비롯해 500명의 주교와 5,000명의 사제를 위해 무지개 예복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여기에 하나를 더 꼽으면 파리 시내를 거닐다가 벽만 보이면 자기가 즐겨 그리는 여자, 남자 그리고 천사의 얼굴을 낙서하는 점이다. 프랑스의 사진작가인 *제임스 볼트(James Bort)는 그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까스텔바작은 수십 년 동안 다양한 영역에 걸쳐 창조성과 작품들을 통해 우리 시대에 대표적인 예술가로서의 궤적을 남기고 있다. 그의 사상은 패션과 음악, 공동 창작, 연출, 그림의 새로운 개념과 방향을 제시하는 근간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는 패션이라는 제한된 영역에 자신을 고정시켜 두지 않는 다양한 얼굴의 예술가다. 그래서 영화, 미술, 디즈니 애니메이션, TV, 만화, 패션을 비롯해 수많은 영역에서 이것저것을 건드려보며 또 모아서, 뒤집어 보고, 직설적으로 쓰기도 하고 응용하고, 풍자하고, 혼돈 속으로 몰아넣기도 하면서 우리에게 볼거리를 제공해 준다.”

 

* 제임스 볼트(James Bort)
프랑스의 사진작가로, 패션·명품업계의 화보, 영상 촬영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LVMH, 크리스찬 디올, 장 폴 고티에, 랑방, 불가리, 반 클리프 앤 아펠, 입생 로랑 등의 화보를 촬영했다.

 

 

여기까지 그에 대해 알려진 정보들을 보면서 끝내 나는 그에 대해서 뭐라고 정의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세상에 있는 단어에는 그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없는 듯했다. ‘그를 뭐하고 불러야 할까?’ ‘도대체 이런 디자이너를 뭐라고 불러야지?’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국 그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 걸까?’ 이러한 생각은 컨셉 휠이라는 도구를 통해 그가 어떤 성격(?)의 휴먼 브랜드인지를 알아보게끔 나를 자극시켰다.

 

다시 한번 최근 그의 작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공교롭게도 소위 까스텔바작의 화학식은 ‘F’라는 단어로 정렬되고 있었다. 그는 패션(Fashion)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이 모두가 ‘환상적인’ 혹은 ‘몽환적인(Fantasy)’ 이미지를 만들고 있었다. 판타지(Fanatsy)를 구성하는 방법은 다름 아닌 융합(Flux)이었다. 그는 감성(Feeling)과 재미(Fun)를 섞어, 미래(Future)적인 이미지로 판타지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런 형태의 융합을 그는 1969년부터 해왔다는 점이다. 그의 이러한 실험 정신으로 탄생한 첫 작품은 놀랍게도 ‘담요로 만든 옷’이었다.

 

F로 정렬되는 그의 화학식을 따라가 보니, 그의 정체성이 ‘FEGO’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FEGO는 장난감 브랜드인 LEGO에서 가지고 왔다. LEGO의 창업자인 올레 키르크 크리스챤센(Ole Kirk Christiansen)은 덴마크어로 ‘잘 논다(Leg와 Godt)’를 뜻하는 단어를 조합하여 LEGO를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까스텔바작은 레고를 가지고 옷을 만들거나 자신의 얼굴과 심벌을 레고로 만들기도 했으며, 레고의 디자인을 차용해 레고 안경과 레고 시계를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페고의 관점으로 다시 까스텔바작의 작품 세계를 보면 레고처럼 기억, 상징, 의미, 트렌드들이 마치 퍼즐을 맞추듯 하나하나 맞춰지면서 새로운 그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고 있는 듯했다.

 

 

 

작품은 영혼의 투영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미학 사상을 근간으로 아름다움을 위한 세 가지 구성요소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첫째는 조화(Harmony)라고 말할 수 있는 Consonantia이다. 이것은 각 부분이 갖는 의미들과 그 부분들이 하나를 이루어 내는 총화로서의 조화다. 이것을 다시 공감각적인 표현으로 말한다면 일종에 ‘공명, 연합, 융합’이라는 말로 얘기할 수 있다.
둘째는 빛(Radiance)이라는 뜻의 Claritas로서 사물 속에 내재하는 빛이다. 이것은 본래 창조의 목적을 발견하여 현상화한 것으로서 원형적인 성질을 말한다.
셋째는 전일성(Integrity)이라고 불리는 Integritas다. 이것은 말 그대로 완전성으로서 대상과 구분되어지는 독자성, 그리고 연속성을 말한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소믈리에의 혀처럼 아름다움을 이 세 가지로 구분하여 음미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토마스 아퀴나스도 “보기에 즐거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고 말했다. 아름다움은 이처럼 총체적이다. 보기에 즐거운 것이 아름다움이라고 한다면, 까스텔바작의 작품들은 그 기준과는 너무나 멀다. 고전적 미학 관점으로 까스텔바작의 최근 옷을 보면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이 아니라 난해하다. 조화보다는 파괴, 원형보다는 기형, 그리고 전일성보다는 특이성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이해할 수 없어서 느낄 수 없는 것들이 더 많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그가 만든 30년 전 옷을 보면 난해함이 아니라 놀라움을 발견할 수 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30년 전에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에도 그 옷을 입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아름답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지금 패션계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혁신적인 컨셉들은 이미 그가 수십 년 전에 해온 임상실험이라는 점이다.

 

그에게는 어떤 미학의 코드가 있는 것일까? 대체 어떤 관점으로 디자인을 하기에 현재에 창조된 미래의 옷을 만들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질문밖에 없을 것이다. 질문은 간단하다. ‘당신은 누구인가?’ 그리고 ‘무엇이 되려고 하는가?’이다. 그래서 그를 만나자마자 첫 질문으로 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그는 마치 부메랑처럼 그 질문을 나에게 도로 던져버렸다. ‘그럼 당신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혹은 ‘내가 무엇인 것 같은가?’ ‘그리고 추가하자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 같은가?’ 다시 돌아온 질문에 대답하려면 그를 컨셉추얼라이제이션이라는 X-ray로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Jean-Charles de Castelbajac이라는 그의 이름 아래에는 총 세 개의 브랜드가 있다. JC de CASTELBAJAC,CASTELBAJAC, JC/DC가 그것이다.

 

각각의 브랜드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가로 축과 세로 축으로 각각 세 개의 컨셉들이 마치 씨줄과 날줄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첫 번째 살펴볼 컨셉은 Legend다. 파리에서 40년 넘게 쇼 무대 위를 워킹하고 있는 그의 브랜드는 이제 전설(Legend)이 되고 있다. 그의 작품이 만들어온 역사는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새로운 형상과 감정이라고 불리는 판타지(Fantasy)를 만들기 위해 단순한 아름다움보다 실험적인 미를 구현해 왔기에 패션이 아닌 아트(Art)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의 브랜드에서는 상품의 메시지라 할 수 있는 아우라(Aura; 독특한 매력, 기운)를 느낄 수 있다. Fantasy-Art-Aura로 만들어지는 Legend가 가장 높은 계열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계열은 Luxury(Archetype-Creativity-Original)로 이어진다. 까스텔바작의 럭셔리는 고가 명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luxury의 라틴어 어원인 ‘풍부하다’와 ‘빛나다’에 가깝다.

 

일단 그가 추구하는 가치는 지금은 없지만 앞으로 중요한 형태가 될 ‘원형(Archetype)’이다. 또한 현재 트렌드로 희석되고 퇴화해 버린 ‘기원(Original)’의 추구다. 무엇보다 이 모두를 그는 자신만의 ‘창의성(Creativity)’으로 창조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럭셔리는 창의성이 풍부하고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며, 눈이 번쩍 띄게 만드는 바로 그런 것을 말한다. 세 번째 계열은 Life인데, 여기서 Life란 단순히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적인 삶을 말하는 것으로 정리하자면, L.I.F.E.(Learning Innovation For Evolution)를 말한다. 즉, 그의 Life는 생존(Live)이 아니라 배우고 성장하고 완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세 번째 계열은 Trend-Style-Pop Culture라는 컨셉어로 다시 나눠 볼 수 있다. 여기서 ‘Trend’는 흔히 패션에서 사용하는 유행이 아니라 이 단어의 원래 의미인 ‘방향’을 의미한다. Style도 마찬가지다. 패션에서 말하는 옷의 스타일이 아니라 ‘모양’ ‘형태’를 의미한다. 우리가 흔히 브랜드를 문화의 결정체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를 해석해 보면, 그의 작품은 대중문화의 ‘방향’성을 알려 주는 ‘모양’, 혹은‘형태’를 갖춘 메시지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까지 살펴본 Legend, Luxury, Life라는 세 개의 계열을 컨셉 휠로 다시 옮겨 보면 <그림 2>처럼 마치 원자 모형을 이루는 것과 같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다. 그는 누구일까? 지금까지 살펴본 화학식과 컨셉어들로 미루어 짐작해 그를 정의해 본다면 Fashion Cre(ative)Editor임에는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가 창조적인 에너지를 이용해 자신이 하지 않은 창조물을 편집해서 재창조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편집된 것을 다시 창조해서 새로운 편집물까지 만든다. 없던 것을 만드는 창조자보다는 원형과 기원을 융합시켜 새롭게 만들기 때문에 Cre-Editor라고 할 수 있다. <그림 3>을 보면 이 의미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보아뱀이 코끼리를 삼킨 상상력은 어떤 종류일까? 옷을 X-Ray판처럼 만든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그냥 재미일까? 아니면 우리에게 마음으로 볼수 있는 눈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려는 것일까? 그런데 이 Fashion Cre(ative)Editor만으로는 독특하다 못해 이적(?)에 가까운 그의 모습들을 전부 포함할 수는 없다. 단적으로 그가 남긴 거리의 흔적이 그 예다.

 

 

 

 

이것은 낙서일까? 벽화일까? 구글에서 그를 검색해 보면, 패션쇼장뿐만 아니라 거리에서도 그의 작품을 볼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4>를 보자. 일관성이 있는 천사(?) 그림이다. 날개는 지금까지 우리가 보았던 천사의 것과는 매우 다르다. 낙서라기에는 너무나 일관성이 있어서 일종에 사인(sign)처럼 보인다.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온화한 미소를 가진 천사의 그림으로 악한 영혼을 물리치기 위한 동양의 부적처럼 보이기도 한다. 낙서는 예술 혹은 디자이너의 전유물이 아니다.

 

원래 낙서는 과학자, 물리학자, 경제학자 등 전 분야의 수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에서 몰입과 직관으로 해답을 찾아가는 일종의 지도다. 그래서 낙서는 ‘신의 서명’이라고 이름 붙여지기도 한다. 이러한 신의 서명을 통해 법칙을 발견하고, 흩어져 있던 지식들을 융합시킨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아인슈타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 마티스, 피타고라스, 가우스, 페르마 등이 있다. 후대 사람들은 이들의 낙서 노트만을 따로 수집하여 책으로 만들었을 정도다. 어쨌든 그에대한 정의를 내리기 위해선 백문불여일견(白文不如一見), 그를만나봐야 했다.

 

 

그가 창조적인 에너지를 이용해
자신이 하지 않은 창조물을 편집해서 재창조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편집된 것을 다시 창조해서 새로운 편집물까지 만든다. 
없던 것을 만드는 창조자보다는
원형과 기원을 융합시켜 새롭게 만들기 때문에 Cre-Editor라고 할 수 있다.

 

 

 

Castelbajac vs. Castelbajac

까스텔바작을 만난 곳은 강남에 있는 어느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레스토랑으로 들어서는 순간 미국의 소위 컨트리송이 흘러나왔다. 까스텔바작은 음악과 레스토랑의 분위기가 맞지 않는다며 대뜸 레스토랑의 매니저를 불렀다. 그리고는 왜 이 레스토랑에서 이런 분위기의 음악이 흘러나오냐고 물었다. 매니저는 인터넷의 음악 사이트에 올려진 좋은 노래들을 모아서 재생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까스텔바작은 “음식점의 음악은 영혼의 수프”라면서 “레스토랑의 음악은 향신료가 아니라 음식 그 자체”라고 말했다. 레스토랑 덕분에(?) 나는 음악이 영혼에게 주는 풍부한 감성에 대해서 아주 자세히 듣게 되었다.

 

유니타스브랜드(이하 UB) 어떤 시작이든지 처음에는 항상 운명과 우연이 동시에 섞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일들은 처음부터 운명적으로 시작하지는 않고, 아주 우연하게 시작되죠. 당신이 패션을 시작해서 40여 년 동안 이 길을 걸어왔다면 분명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잠깐 40년을 돌이켜서 여기까지의 운명적 상황을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까스텔바작 돌이켜 보면, 저의 인생은 때마다 당시에는 알 수 없는 어떤 큰 힘에 의해 조각들이 만들어지면서 지금은 그 조각들이 하나로 완성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공시성’입니다. 저에게는 공시성이라 할 수 있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어요. 당시에는 항상 이런 현상에 대해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해석조차 할 수 없었죠.

 

지금의 저에 대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앞으로 한국에서 제가 해야 할 일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저의 기원에 대해 말해야 될 것 같습니다. 저의 집안은 829년의 *나바라 왕국(Kingdom of Navarra)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주 오래된 가문입니다. 1300년 Philippe Le Bel 왕 때 선조인 Pierre de Castelbajac이 남작이라는 귀족 작위까지 받게 되었죠. 조상 대대로 저희 집안은 군인 집안이었습니다. 저 또한 여섯 살 때부터 할아버지가 다니던 군인예비사관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죠. 그런데 이곳은 불합리하고 체벌이 아주 심한 학교였어요. 제 상상력의 기원은 암울했던 이때부터 시작된 것 같습니다. 저는 매일 밤마다 아마존의 정복자가 되거나, 동화 속의 주인공이 되거나, 아니면 기숙사가 아닌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는 상상을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상상을 통해 현실 도피를 한 것은 힘든 학교 생활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즈음 저희 가문은 몰락했어요. 할아버지는 무려 세 채나 되는 성城을 소유하고 있었고, 어디를 갈 때면 전용 열차를 타고 갈 정도로 엄청난 부자였지요. 아버지도 12대 후작이자 26대 남작인, 그러니까 귀족으로 사회적 지위가 높았습니다. 또한 최고의 방직 기술자로, 당시 아버지와 함께 일하던 분이 바로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창업주인 *마르셀 부삭(Marcel Boussac)이에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그만 경마에 모든 재산을 탕진해 버렸어요. 아버지가 32세 되던 해에 가문은 완전히 몰락해서 결국 아버지는 모로코로 건너가 궁정에서 피아노를 치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 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젠가 제가 가문을 다시 일으켜야 된다는 강한 소명이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소명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 같습니다.

 

저는 열두 살 되던 해 오라토리오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로 옮겼지만 이곳은 전의 기숙사보다 훨씬 더 좋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최악이었습니다. 결국 17 때 그 학교에 불을 지르고 퇴학을 당했습니다. 그 당시 저의 어머니는 작은 봉제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퇴학을 당한 후 저는 어머니 밑에서 잡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어머니의 제안으로 디자인 스케치를 하게 되었지요. 우습게 들리겠지만 당시 저는 패션을 통해 저의 불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분노를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이제까지 제 삶과 생각뿐만 아니라 기존의 강요된 관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혁명을 패션을 통해 외치고 싶었던 거죠. 패션은 저에게 있어 분노의 승화였던 겁니다. 가문의 몰락과 기숙사의 억압적 생활은 제게 아픔이지만, 이것은 저에게 ‘올바르게’ 분노할 에너지원이 되어 준 셈입니다.

 

* 나바라 왕국(Kingdom of Navarra)
중세 유럽 봉건 국가 중 하나로, 현재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 지대를 영유하고 있었다. 까스텔바작의 시조 에네코 아리스타(Eneco Arista)가 나바라 주 팜플로나 지역의 왕으로 추대되며 왕국이 건국되었다.

 

* 마르셀 부삭(Marcel Boussac)
1889년 출생, 1980년 사망. 프랑스의 사업가로, 1947년 크리스티앙 디오르를 후원했고, 이를 계기로 디오르는 현재 파리 몽테뉴 가에 점포를 열어 콜렉션 ‘New Rock’으로 패션 혁명을 일으켰다.
 

 

UB 어떤 식의 분노를 패션에서 보여 주었나요?
까스텔바작 그때 저는 디자이너거나 예술가는 아니었습니다. 반(反)문명, 반(反)전통을 추구하는 기괴한 *다다이즘(dadaism)에 빠진 몽상가였다고 생각합니다. 군복의 카키색에서 영감을 얻기도 했고, 채소 장수들이 쓰는 플라스틱 풀과 체리로 옷을 만들기도 했어요. 그런가 하면 감자를 담는 부대나 의료용 실로도 옷을 만들었지요. 그 당시 프랑스의 유행은 너무 여성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상류 계층을 위한 스타일을 추구했어요. 저는 그런 트렌드에 대해 사람들의 분노를 담은 옷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옷이 꼭 예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패션은 저의 전투장이었습니다.

 

1967년에는 지금과 같은 패션쇼는 없었죠. 그러니까 패션이 산업은 아니었어요. 주로 양장점에서 만들어 내는 맞춤복이 패션을 리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환경에서 저는 파리 프레타포르테 살롱에 참여해 대형 기업들의 부스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는 저의 옷을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살롱에 참여한 지 3일째 되는 날, 주변 기업들에서 저의 부스를 영업 방해로 신고 했습니다. 저의 부스로 사람들이 아주 많이 왔기 때문이죠. 어머니는 살롱에서 이룬 저의 작은 성공을 보고 디자인 회사를 차려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운영하는 회사의 이름을 KO & CO로 바꾸고 지인이던 *샹탈 토마스(Chantal Thomass)와 *겐조 다카다(Kenzo Takada)와 함께 컬렉션 작업을 했습니다. 그 결과는 폭발적이었죠. 10여 개 기업들이 저에게 함께 일하자고 제안이 왔을 정도였죠. 그때 저는 18세밖에 안 된 청년이었어요. 기라로쉬(Guy Laroche)에서는 오트쿠뛰르 제안도 했지만 저는 이 모든 것을 거절했습니다.

 

 

 

 

* 다다이즘(dadaism)
다다이즘(dada)는 프랑스어로 ‘목마’를 뜻한다. 기존 통념에 반기를 들어 예술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들로 예술을 창작한다. 까스텔바작은 1968년 그의 첫 컬렉션부터 담요와 가짜 풀로 옷을 만들었다.

 

* 샹탈 토마스(Chantal Thomass)
1947년 출생한 프랑스의 란제리 디자이너. 1975년에 본인의 이름을 딴 란제리 브랜드 Chantal Thomass를 런칭했다. 유럽 전역 및 일본, 홍콩, 미국 등지에 진출해 있다.

 

* 겐조 타카다(Kenzo Takada)
1939년 출생한 일본의 패션 디자이너로, 브랜드 겐조(Kenzo)의 설립자다. 일본, 아프리카 등 이국적 문화를 다채로운 색과 무늬로 녹여냈다. 1984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문화훈장 ‘슈발리에’를 받았다.

  

그때 파리는 이른바 여성해방운동이 막 시작되는 태동기였어요. 당시 저는 제 안에 있는 분노의 혁명과 사회의 해방이 매우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질 들뢰즈(Gilles Deleuze) 철학에 푹 빠져 있었죠. 그러면서 20대 초반에 저의 철학이 구축되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저의 세계관이 만들어진 거예요. 저는 이 철학을 제 패션에 주입시켰습니다. 예전에는 반항적인 차원에서 패션을 이용했지만, 이러한 철학이 정립되면서부터는 새로운 장르와 이미지라는 세련된 형태의 메시지를 통해 저의 분노를 표현하기 시작했죠. 그때부터는 분노가 단순히 화난 감정이 아닌, 생각의 형태 혹은 다른 방향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어요.

 

* 질 들뢰즈(Gilles Deleuze)
20세기에 활동한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다. 미셸 푸코가 “언젠가 20세기는 들뢰즈의 시대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그는 구조주의를 비롯한 서구의 근대 이성을 분석, 비판하며 철학, 문학, 심리학, 영화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새로운 개념과 이론을 선보였다.

 

이렇게 분노로 시작된 까스텔바작의 첫 번째 도전은 성공적이었다. 세상은 그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만들어 낸 새로운 이미지가 매우 상업적이라는 것도 알아차렸다. 까스텔바작은 어머니 회사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의 스튜디오에서 일하면서 높은 수입을 올렸고 그것으로 큰 아파트도 샀다. 그리고 그 아파트에서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 함께 생활하였는데, 바로 그 시점이 까스텔바작에게는 매우 중요한 시점이 되었다고 한다.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의 매니저인 *말콤 맥라렌(Malcolm McLaren), 배우 *데이비드 요한센(David Johansen), 기타리스트 *실 실베인(Syl Sylvain) 등을 비롯하여, 실험적인 예술가 *키스 해링(Keith Haring), 패션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 Westwood), 천재적인 팝 아트 예술가 *장 미쉘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그리고 사진작가 *로버트 메이플소프(Robert Mapplethorpe) 등 수많은 혁신적인 사람들이 그의 아파트에서 일종에 합숙을 하며 생각의 충돌을 즐겼다고 그는 젊은 날을 회상했다. 그의 아파트에 우정으로 모인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받게 되었고, 이것은 항상 새롭고 다른 것을 추구하는 까스텔바작에게 지금의 창조 에너지를 만드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 말콤 맥라렌(Malcolm McLaren)
1946년 출생, 2010년 사망. ‘펑크의 대부’, ‘원조 펑크 록커’의 별명을 갖고 있었으며, 세계적 펑크그룹 섹스 피스톨즈를 길러냈다.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옛 연인이기도 하다.

 

* 데이비드 요한센(David Johansen)
1950년 뉴욕 출생. 1970년대 초반 뉴욕 돌스(New York Dolls)의 보컬로 활동하고, 솔로음반을 발매하기도 했다. 1980~90년대에는 배우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재결합한 뉴욕 돌스의 보컬로 활동 중이다.

 

* 실 실베인(Syl Sylvain)
1951년 카이로 출생. 밴드 Actress의 기타리스트였고, 1970년대 초반부터 데이비드 요한센과 함께 뉴욕 돌스(New York Dolls)의 멤버로 활동했다. 현재는 뉴욕 돌스의 기타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년 출생, 1990년 사망. 미국 출신의 그래피티 예술가로, 1980년대 뉴욕의 하위 길거리 문화의 영향을 받아 그래피티 예술의 새로운 장을 열며, 상위예술과 하위예술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
1941년 출생. 영국의 패션 디자이너다. 말콤 맥라렌의 옛 연인으로 펑크룩을 만들며 유행을 주도했다. 체제에 대한 반역성과 엘레강스를 동시에 보여주는 전위적 디자인의 패션을 선보이고 있다.

 

* 장 미쉘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1960년 뉴욕 출생, 1988년 사망. 지하철과 거리의 낙서를 예술 장르로 승화시키며 뉴욕에서 그래피티 예술가로 명성을 얻었다. 팝아트 계열의 자유구상화가로 ‘검은 피카소’라는 별명이 있다.

 

* 로버트 메이플소프(Robert Mapplethorpe)
1946년 출생, 1989년 사망. 미국의 사진작가로 꽃, 남성 누드, 본인을 포함한 인물을 주로 찍었다. 동성애 같은 도발적인 주제를 담아냈고, 피사체 그대로보다 조형성을 강조한 기법이 특징이다.

 

그야말로 그의 70년대는 미래의 예술(지금은 현재가 되어 버린) 아이콘들과 더불어 존재하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낙서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키스 해링과 장 미쉘 바스키아 등도 낙서로 유명한 사람들이 아닌가. 그 시절 천재들이 교류했던 그들만의 습관이었다(까스텔바작은 지금 인터뷰 중에도 계속 낙서를 하고 있다).

 

이렇게 패션 디자이너로서 포문을 열게 된 까스텔바작은 컬렉션 작업을 연 지 8년 만에 이탈리아에서 Iceberg Line을 발표하게 된다. 거기에 막스마라(MaxMara)의 스포트막스(Sportmax) 라인 디자인까지 맡으며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실험적인 디자인은 멈추지 않는다. 1982년에는 장 샤를 블리아(Jean-Charles Blias), 로베르 콩바스(Robert Combas), 룰루 피카소(Loulou Picasso), 벤(Ben), 아네트 메사제(Annette Messager), 제라르드 가루스트(Gerard Garouste), 에르베 디 로자(Herve Di Rosa), 미겔 바르셀로(Miquel Barcel) 등의 작품을 이용한 *세계 최초의 프린트 드레스를 만들어 선보인 것이다.

 

* 세계 최초의 프린트 드레스
1982년, 까스텔바작은 재활용품을 활용하는 프랑스 화가 Jean-Chrarles Blias, 포스트모더니즘 화풍의 스페인 화가 Miquel Barcelo를 포함한 73명의 예술가들의 작품을 응용하여 화려한 색감의 독특한 프린트 드레스를 선보인다. 까스텔바작은 이 작품들에 대해 “Art and fashion are woven together in my life like a piece of fabric(예술과 패션은 마치 직물의 조각을 짠 것처럼 내 삶 속에서 서로 함께 한다)”이라고 말했다.

 

 

  

 

 

20대 초반에 저의 철학이 구축되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저의 세계관이 만들어진 거예요.
저는 이 철학을 제 패션에 주입시켰습니다.
예전에는 반항적인 차원에서 패션을 이용했지만, 이러한 철학이 정립되면서부터는
새로운 장르와 이미지라는 세련된 형태의 메시지를 통해
저의 분노를 표현하기 시작했죠.

 

 

UB 그럼 당신의 다다이즘과 같은 실험정신의 성공은 언제까지 지속되었습니까?
까스텔바작 1980년대까지는 매우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가 되면서 사람들은 저를 ‘아름다운 패자’라고 부르더군요. 이때는 모든 패션에 미니멀리즘이 산업화와 함께 거대한 시장이 만들어진 시기입니다. 1980년대처럼 이념과 철학의 대치보다는 풍요와 상업화가 대세인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거죠. 패션을 통해 혁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저로서는 이 상업화의 물결로 인해 뒤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밀려날수록 저의 신념은 더욱 강해졌고, 그러면 그럴수록 세상 속에서 저의 입지는 더욱 작아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992년이었죠. 어느 날 사촌이 저를 찾아와서 매우 흥미로운 부탁을 했습니다. 권위적인 신부의 복장으로 인해 감옥에서 아무도 예배를 드리려 하지 않는다며, 신부가 재소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옷을 만들어 주자는 제의였습니다. 저는 투명한 천에 하얀색, 초록색, 파란색, 빨간색 십자가를 그려서 예복을 만들었죠. 재소자들은 신부가 특이한(?) 옷을 입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것이 궁금해서 예배당을 기웃거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결국 미사를 드리게 되었죠. 그 후 5년이 지난 1997년, 저는 바티칸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죠. 교황의 비서실로부터 온 전화였어요. 내용인즉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 기독 청년의 날’ 행사의 예술감독을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행사에 모이는 100만 명의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옷도 디자인해 달라고 하더군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한참을 고민했어요. 저는 성경 속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죠. 홍수가 난 다음 하나님이 노아에게 다시는 홍수로 벌하지 않겠다는 증표로 무지개를 보여 주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이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어, 신부 5,000명이 입을 옷에는 일곱 가지 무지개 색 중 주황, 파랑 등 몇 가지 색으로 줄무늬를 그려 넣었고, 추기경들의 옷에는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색으로 줄무늬를 만들었죠. 마지막으로 교황에게는 일곱 가지 색깔을 모두 넣어 하나됨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모인 100만 명의 청년들에게는 추기경과 똑같은 티셔츠를 나누어 주었어요. 그렇게 제가 만든 옷을 입은 수만 명이 군집했습니다. 1997년 8월 24일, 그날 저는 ‘내 인생이 바뀌었구나’하는 운명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직도 그 소리가 생생합니다. 행사가 끝난 다음날 교황을 만나러 갔더니, 교황이 저에게 손을 내밀며 묵주를 건네더군요.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은 신념과 희망의 시멘트를 만들어 냈습니다. 색깔들을 신념과 희망의 시멘트로 썼습니다.” 그때 저는 패션이 분노의 표현이 아니라 희망의 상징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전까지 저의 패션은 과거와 현재에 대한 항거였다면, 이날 이후로 미래와 젊은 세대를 위한 희망으로 변화되었죠.

 

UB 교황뿐만 아니라 현재 최고의 패션 아이콘이라 불리는 *레이디 가가에 이르기까지 당신에게는 너무나도 다양한 고객이 있습니다.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들 어떤 면에서는 ‘극단’에 있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고객을 고르라고 한다면 힙합층이라 할 수 있을 텐데요. 당신은 군인에다 귀족 가문에서 자라났습니다. 어찌 보면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그런 가문에서 자라났다면 당신 안에 잠재되어 있는 문화 코드는 이들과는 반대편에 있는 것 아닙니까?

 

* 레이디 가가
유명 팝 가수인 레이디 가가는 그동안 화려하고 기발한 의상을 선보이는 가수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 그녀가 한 방송사의 인터뷰에서 장 샤를 드 까스텔바작의 09-10FW(2009/2010 Fall & Winter Season) 컬렉션에서 선보였던, 개구리를 소재로 한 의상을 입어 또 한 번 화제를 불러 일으킨 적이 있다.

 

까스텔바작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는 곰 인형인 테디 베어를 수십 개 엮어 옷을 만든 적이 있습니다. 이 옷은 전 세계에서 단 여섯 벌이 팔렸죠. 이 옷을 산 사람은 독일의 억만장자인 *앨버트 본 순 운트 택시스(Albert von Thurn und Taxis)를 비롯해, 마돈나(Madonna), *다이애나 로스(Diana Ross), 힙합 가수 *LL Cool J와 영국의 *빅토리아앨버트 뮤지엄(Victoria & Albert Museum)에서 두 벌을 샀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술품으로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리고 어떤 곳은 유산과 기념품으로 샀습니다.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힙합층이라는 구분보다는 저항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제 옷을 좋아한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저의 옷에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극단에 있는 사람들이 저의 옷을 구매하는 것은 자신의 메시지를 분명히 만들고 싶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의미로 빅토리아앨버트 뮤지엄에서 저의 회고전을 연 적이 있습니다. 뮤지엄 측에서 명명한 이 회고전의 제목은 이것이었습니다. ‘Popaganda, The Fashion Style of JC de Castelbajac.’ 이 회고전은 저를 다시 조명하는 계기가 되었죠. 레이디 가가도 이 전시를 관람한 후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제 옷을 원했다기보다는 자신의 이미지와 부합한다고 생각해서 제 옷을 입은 거지요.

  

* 앨버트 본 순 운트 택시스(Albert von Thurn und Taxis)
독일의 왕족 출신으로 부동산, 예술품 등 20억 달러가 넘는 자산을 상속 받아 2005년 미국 경제 전문잡지인 〈포브스〉가 선정한 ‘올해의 세계 부호 명단’에 올랐다. 당시 포브스의 갑부로 꼽힌 691명의 평균 나이가 64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앨버트 본 순 운트 택시스는 당시 나이 21세로 최연소 억만장자로 선정되었다.

 

* 다이애나 로스(Diana Ross)
1944년생. 1960년대 여성 그룹 더 슈프림스의 리드보컬로 활약하다가1970~1980년대에 솔로로 활동하며 음악뿐만 아니라 뮤지컬, 영화에서도 성공하며, 1976년에 빌보드지에 ‘이 시대의 여성 엔터테이너’로 선정되었다.

 

* LL Cool J
엘엘 쿨 제이LL Cool J는 미국 최고의 랩 슈퍼스타이며 영화배우로도 성공한 힙합 가수다. 1984년 16세의 나이로 음악계에 데뷔하여 큰 인기를 끌었으며 1980~1990년대 초반까지 흑인 랩 음악을 주도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 빅토리아앨버트 뮤지엄(Victoria & Albert Museum)
영국 런던 사우스켄싱턴에 위치한 영국 왕립박물관 중 하나다. 2006년 모피나 양피로 만든 옷, 팝아트를 프린트한 옷, 미키 마우스와 피카츄 등 캐릭터를 모티브로 한 옷, 록스타(Rockstar)의 세계를 표현한 4가지 테마의 옷을 선보인 까스텔바작의 회고전 ‘Popaganda, The Fashion Style of JC de Castelbajac’을 개최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누구인가? Popaganda
‘프로파간다(propaganda)’의 뜻은 "정치적으로 선전 혹은 선동하다"라는 뜻으로, 대중적이며 특별한 사상과 개념을 전파할 목적으로 하는 음악, 문화, 그리고 예술가를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빅토리아앨버트 뮤지엄에서는 까스텔바작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정의한 것 같다. 그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해 1970년부터 2000년대까지 그와 함께 한 두 명의 지인에게 까스텔바작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보자. 먼저 말콤 맥라렌은 이렇게 말했다.
 
Malcom Robert Andrew Edwards
“나는 20년 이상 까스텔바작을 알고 지냈다. 나는 위스키를 마시고, 그는 와인을 마셨다. 나는 반항아처럼 옷을 입었고, 그는 *Perfecto 재킷을 입었다. 그에게는 빨간 할리 모터사이클이 있었는데 그는 그걸 타고 몽마르뜨 거리를 오르내렸다. 그는 밤이면 핀볼 게임을 하곤 했는데, 나는 잘 하지 못했지만 그는 매우 잘했다. 나는 친구인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무대 의상 작업을 했고, 섹스 피스톨즈를 결성했다. 그는 패션 디자이너가 되었다. 나는 검은색의 바스크 베레모를 쓰고 가죽옷을 입었다. 그는 군복 같은 걸 입었다. 우리는 테크노(Techno)와 록(Rock), 그리고 낭만주의와 상황주의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나는 섹스 피스톨즈의 무대의상을 만들기 위해 가죽과 고무를 사용했다. 그는 그의 의상에 담요를 사용했다. 나중에 나는 파리로 이사했고, 에스닉(Ethnic) 음악을 좋아했다. 그는 결혼을 했고, 18세기 음악을 좋아했다. 나는 격자무늬 슈트를 입었고, 그는 매우 클래식(Classic)한 옷을 좋아했다. 나는 무정부주의자였고, 그는 왕정주의자였다. 나는 힙합(Hip-Hop)과 *Buffalo Gals를 좋아했고, 그는 *Roxy의 음악을 좋아했다. 그는 뉴에이지(New Age) 음악을 들었고, 그의 디자인은 팝(POP) 문화에 기반했다. 나는 유럽을 좋아했고, 그는 미국을 좋아했다. 나는 고전주의를 좋아했고, 그는 현대 미술을 좋아했다. 나는 오페라를 좋아했고, 그는 블루스를 좋아했다. 나는 나비 부인을 재해석했고, 그는 미키 마우스를 재창조했다. 나는 영적인 것을 좋아했고, 그는 천사를 좋아했다. 나는 *알리스터 크로울리(Alister Crowley)의 반지를 끼었고, 그는 그의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반지를 끼고 있었다. 지금 나는 런던에 살고, 그는 파리에 산다. 나는 토종 스코틀랜드 사람이고, 그는 뼛속까지 프랑스인이다. 그는 나의 가장 오래된 벗이고, 나 또한 그의 가까운 친구다.”
 
  
 
Jean-Francois Bizot
이번에는 *프랑스의 언론인 장 프랑소아 비조(Jean-Francois Bizot)에게 까스텔바작을 들어보자.
“그에게는 할리데이비슨의 모터사이클이 한 대 있었는데, 라이더 재킷을 입은 모습이 무척 터프했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저것 봐, 로큰롤 귀공자께서 납시셨군.” 그의 모습은 좀 이상했다. 그때 그는 재미 삼아 패션 쪽의 일을 막 시작할 때였고, 자신을 할리 모터사이클을 사기 위해 창을 팔아먹은 반항적인 중세 기사쯤으로 여겼다. 그는 리슐리외(Rue de Richelieu) 30번가의 Pierre d’ Alby’s에서 무척 즐겁게 패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우편으로 발송되는 잡지를 만들면서, 언론사의 각 부서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부터 나중에는 어떻게 언론사를 꾸려 나가는지까지 차근차근 배우고 있었다. 우리는 1972년 그곳에서 만났다. 나는 그때 막 일을 시작했고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펑크(Punk)에 매료되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그도 자신만의 고민거리가 있었다. Jean-Charles은 그의 이국적인 이인용 판초로 유명했는데, 밤이면 티셔츠와 옷들을 갈가리 찢곤 했다.”

 

 

  

 

 

* Perfecto 재킷
Schott NYU는 1928년에 Perfecto 618 라이더 자켓을 탄생시키며 유명해졌다. 오토바이 라이더 세대와 맞물리며 이 자켓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1953년 영화 ‘The Wild One’의 배우 말론 브란도(Marlon Brando)가 Perfecto자켓을 착용하면서 인기가 절정에 달했으며 현재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 Buffalo Gals
이 곡은 1844년 미국의 유명한 음유시인으로 알려진 John Hodges에 의해 만들어져 ‘Lubly Fan’이라는 타이틀로 소개된 미국의 전통적인 노래다.

 

* Roxy Music
1970~1980년에 활동한 전설적인 아트 록 밴드인 록시 뮤직은 아방가르드와 팝의 경계를 넘나들며 실험성 강한 음악을 선보인다. 그들은 이런 미묘한 음악적 스타일만큼이나 기이한 패션으로 유명했으며 기존의 아트 록 밴드와의 차별성을 확실히 하며 마니아층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사랑도 받았다.

 

* 알리스터 크라울리(Alister Crowley)
본명은 알렉산더 크로울리(Alexander Crowley)로 1875년 영국 워웍셔(Warwickshire)의 엄격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지나친 금욕 생활과 왜곡된 기독교 교육을 강요 받아 기독교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가지게 된다. 대학입학 무렵 이름을 알리스터(그리스어: 복수의 신)로 바꾸었으며 그의 사상의 핵심인 의지를 나타내는 그리스어 ‘텔레마’를 가지고 전쟁의 신 호루스 신의 율법을 전파한다. 1960년대 히피즘과 록음악 아티스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 장 프랑소아 비조(Jean-Francois Bizot)
1969년 심층 르포 중심의 정치, 사회 뉴스 매거진의 성격을 지닌 〈악튀엘(Actuel)〉을 창간한 프랑스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다.

 

이제 까스텔바작에 관한 두 가지 의문이 모두 해결되었다. 그는 누구이며 무엇이 되려는지도 알았고, 왜 파리의 골목과 벽마다 낙서를 그리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에 관한 이러한 정체성을 브랜드 관점으로 정리해 본다면 한마디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인터뷰 중 “자신의 옷에 비트 있는 메시지를 유머로 담아 사람들에게 직설적으로 들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까스텔바작의 과거를 돌아보며 현재의 그를 알았다면, 이제 그것보다 더 궁금한 점이 세 개가 더 생겼다. 첫째는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작업을 40년 동안 했다면 일련의 패턴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의 창조적인 이미지 생산을 법칙화할 수 있을까? 둘째는 다른 사람이 그것을 응용할 수 있을까? 셋째는 지금도 왕성한 그의 창조력은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보여질까?(이제 그 스스로가 미래의 모습을 예측할 수 있지 않을까?)

 

아쉽게도 이런 질문을 하지 못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아주 재미있는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갔다. 질문의 강도를 높여 비논리적이며 창의적인 질문도 해보았다.

 

 

 

 

UB 당신이 지금까지 보여 준 디자인의 본질적 가치는 기존 시장 질서의 창조적 파괴와 기존의 이미지를 다시 융합하여 만드는 창조적 결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까스텔바작 본질을 말한다면 창조적 파괴와 결합은 ‘수단’에 불과합니다. 저는 인문학적 가치를 패션의 수많은 창작품에서 보여 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인문학적 가치는 ‘인간’ 그 자체입니다. 제 어린 시절의 작품은 기존 질서와 말도 안 되는 억압에 대한 항거였다면, 지금은 젊은이들에게 비전과 방향을 정해주고 싶습니다. 많은 예술가와 브랜드들과 협업을 하는 이유는 창조적 파괴와 결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두 개의 이미지가 서로 충돌하여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저 새로운 것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냥 처음 본 것에 불과하죠. 만약 새로운 것이 미래의 것이라면 그것도 단지 미래의 것이겠죠.
 
제가 말하는 새로운 것이란 미래와 현재 그리고 과거와 공존하면서 서로 존중하며, 변하지 않는 가치를 보존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그런 새로움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래서 현재 EXR코리아와 리니에(LIGNEE)라는 브랜드를 구상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제는 쇼보다 과거를 존중하고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만들어 가는 그런 브랜드를 만들어서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저는 인문학적 가치를
패션의 수많은 창작품에서 보여 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인문학적 가치는 ‘인간’ 그 자체입니다.
제 어린 시절의 작품은 기존 질서와 말도 안 되는 억압에
대한 항거였다면, 지금은 젊은이들에게
비전과 방향을 정해 주고 싶습니다.
제가 많은 예술가와 브랜드들과 협업을 하는 이유는
창조적 파괴와 결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두 개의 이미지가 서로 충돌하여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UB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당신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까스텔바작 저는 번개같습니다. 고스트 바스터(Ghost buster)같기도 하고, 트러블 메이커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보고 아름다운 패배자라고 불렀지만, 제가 저에 대한 정의로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모호함’입니다.

 

프랑스에서 명품 브랜드들은 천재적인 디자이너 혹은 천재적인 가능성이 있는 디자이너가 발굴되면 그를 매체에 노출시키고 연예인들과 만남을 주선하면서 소위 미디어 스타로 만든다. 그리고 그들의 트렌디한 이미지를 자신의 브랜드와 이른바 ‘우성’ 결합을 시킨다. 아무래도 대중들은 브랜드와 신상품보다는 특별한 사람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에 명품 브랜드들은 천재라고 불리는 디자이너들의 작품성보다는 미디어 친화력이라고 불리는 그들의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상품성을 더 중요시 여긴다. 브랜드의 노출은 한계가 있지만 사람의 노출은 언제나 가십과 이야기를 만들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여 디자이너를 트렌드 메이커로 사용하는 것이다.

 

해외 명품 브랜드일수록 작품성보다는 상품성, 상품성보다는 유행성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원래 명품 브랜드들은 속칭 값싼 것 열 개 사느니 제대로(?) 된 것 하나 사서 오래 소장하라는 합리적인 제안을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또 명품일수록 소비자들에게 선보이는 상품의 수량을 조절하면서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유지해야 하는데 이것도 원칙만 그렇지 실상은 다르다. 원칙적으로 명품은 트렌드에 대항하는 것이지만, 오히려 가장 잘 받아들이거나 혹은 주도한다.

 

이런 명품 브랜드들에게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가지고 세상에 없던 이미지를 만들어 내려는 까스텔바작은 탐탁지 않은 인물이다. 브랜드는 천재성이 있는 디자이너를 다룰 수 있을지 몰라도 진짜 천재는 다룰 수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천재들이 대부분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그 진가를 인정받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천재들은 다음 세상을 알았지만, 우리들은 다음 세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까스텔바작의 작품 활동은 무려 40여 년이나 지속되고 있다. 그가 천재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의 1970년대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다고 위에서 언급했다. 지금은 너무나 친숙하게 보이는 이미지이지만 40년 전에는 매우 기이한 패션이었다.

 

 

  

 

 

EXR Korea interview

어찌되었든 까스텔바작의 40년 연대기를 돌이켜보면, 1970년대에 자신을 천재로 만들었던 창조적 세계관 덕에(?) 1980년대와 1990년대는 스스로가 자신을 냉동질소에 보관하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 그가 천재임을 알아본 EXR 코리아의 민복기 대표는 까스텔바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저는 나이키, 휠라, 컨버스, 카파와 같은 라이선스 브랜드를 우리나라로 가져오는 경험을 해보았습니다. 까스텔바작이라는 브랜드도 이런 라이선스 브랜드의 연장선에서 발견한 것이죠. 저는 파리에 직접 가 그의 지하 창고에서 40년 동안 그가 만든 옷들을 보았습니다. 그때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까요, 중세시대의 수도사들이 만든 최고급 와인을 발견했다고 해야 할까요? 숙성된, 그러니까 너무나도 잘 익은 그런 아이디어를 본 것 같았습니다. 1960년대 후반은 아직 패션이라는 개념이 없는 시대였죠. 만약 그때 이것을 보았다면 그는 분명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는 존재하지 않은 개념을 만들고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UB 그런 천재라면 왜 파리의 수많은 브랜드들이 40년 동안이나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민복기  패션 쪽에서 유명한 디자이너들의 홍보는 그를 고용한 그룹의 홍보실 관할입니다. 하지만 까스텔바작은 디자이너였지만 자신의 브랜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가 홍보할 수 없었어요. 이것은 까스텔바작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비즈니스 세계의 생태계라고 할 수 있어요. 이 자리에서 말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예민한 부분이 있습니다.

 

하여튼 저는 지금 동물원에 갇힌 야생 호랑이를 풀어 놓았다고 생각해요. 어떤 상황인지 이해되시죠? 제가 까스텔바작을 프랑스 브랜드라고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관점으로 그를 특이한 디자이너로만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정통성과 전통성을 가지고 아시아와 미국을 보게 된다면 다르게 보일 거예요. 그는 수많은 천재들과 교류하며 살았던 인물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감과 아이디어가 잠재되어 있는 인물이죠. 그러나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저는 상품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상품이 작품이 되기는 어려워도 작품이 상품이 되기는 쉬워요. 참고로 저처럼 라이선스 브랜드를 많이 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 스토리가 얼마나 강력한지도 알고 있지요.

 

 

2. 두 번째 만남

철학자들의 책을 보면 대부분의 첫마디는 ‘어렵다’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책을 덮고 있는 핵심 개념들이 대부분 낯선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설득하고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개념을 만들고 그에 따라 새로운 단어를 만든다. 그런 단어들로 가득 찬 책을 읽는 것은 마치 동네에서 파는 주먹 만한 대왕 사탕을 입에 넣는 것과 같다. 일단 입에 들어갔지만 너무 커서 입이 아프다. 그렇다고 깨물어 먹을 수도 없을 만큼 단단하다. 거기에 생각보다 달지도 않다. 그런 알사탕을 먹으면 일단 어느 정도의 크기가 될 때까지 녹여야 하는데, 그 과정이 참으로 곤혹스럽다. 이처럼 어떤 철학자의 생각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잘 녹지 않고 달지도 않은 대왕 사탕을 입안에 넣는 것과 같다.

 

까스텔바작의 1990년대까지 작품들은 사실 팔기 위해서 만든 옷들은(먹을 만한 사탕이) 아니다. 오직 자신의 생각을 담으려는 궁극적 목적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까스텔바작의 옷들은 그의 말대로 스토리가 있다. 왜 만들었는지,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가 모든 옷마다 단단히 압축되어 있다. 그래서 철학자가 만든 낯선 언어처럼 그리고 대왕 사탕처럼 처음부터 입에 당기지 않는다. 나는 다시 까스텔바작을 만나 보기로 했다. 다시 한 번 그의 ‘본질’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와의 두 번째 만남은 첫 만남 후 꼬박 여섯 달 후인 11월에 이루어졌다. 두 번째 인터뷰는 그가 무엇인가를 만들 때 어떤 방법으로 생각을 전개해 나가고, 또 융합이나 혼합 혹은 결합시켜 나가는지를 비롯하여 첫 번째 인터뷰가 끝났을 때 내가 가졌던 세 가지의 궁금증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두 번째 인터뷰는 그의 인문학적 시각을 조명해보기로 했다. 그의 작품은 완벽하게 새로운 그 무엇을 만들기보다는 지극히 평범한 것들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여 재창조한 것들이 많다. 이런 관점을 가진 인문학자를 꼽으라고 한다면 시인을 들 수 있다. 그래서 인터뷰 도중 그에게 그의 삶을 주제로 한 ‘즉흥시’를 써 보라고 할 참이었다. 그의 문장력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창조성이 어떤 순간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지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가 인문학과 패션의 교차점에서 창조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런 천재일까?

 

이번 인터뷰에는 그의 둘째 아들인 *루이 마리(Louis-Marie)가 동석할 예정이라고 했다. 둘째 아들에게 질의를 하기보다는 아버지인 까스텔바작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사뭇 궁금해졌다. 두 번째 인터뷰가 있기 전, 까스텔바작은 홍익대학교에서 디자이너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한다고 했다. 강의의 제목은 ‘진정성 vs. 가라오케, 창조성 vs. 디스토피아’였다. 그의 강의는 큰 여행용 박스를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박스 안에는 그가 처음으로 가졌던 테디 베어에서부터, 기숙사 생활 때 덮었던 담요,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이 있었다. 까스텔바작은 그것들을 하나씩 보여 주면서 자신의 역사가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를 설명했다. 하지만 너무나 흥미로웠던 것은 그가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한국인만큼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순신 장군이 풍미한 조선의 역사와 프랑스 역사를 비교하며 강의를 이끌어나갔다. 강의의 끝은 단지 트렌드를 위한 상품과 패션을 만들지 말고 상상력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옷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 방법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가장 강조했던 것은 창조성을 통해 세상에 없던 감정, 무엇보다 진짜 감정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마음에서 빠져나가지 않는다.

 

UB 당신이 만든 옷을 다시 보고, 무엇보다 오늘 강의를 들으면서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강의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까스텔바작 그것은 제가 지금까지 받은 칭찬 중에 최고의 과찬인 것 같습니다.

 

* 루이 마리(Louis-Marie)
루이 마리 드 까스텔바작은 프랑스의 국민 디자이너인 아버지 장 사를 드 까스텔바작과 미국의 유명 작가인 어머니 캐서린 드 까스텔바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프랑스에서 배우 겸 디자이너로서도 활동하고 있다.

 

* 장 보드리야르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로, 《소비의 사회》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등 많은 저서를 통해 대중문화와 미디어, 소비사회에 대한 독창적인 이론을 펼친 현대성에 대한 해석이 가장 뛰어난 사람 중 하나이다.

 

UB 지난번 인터뷰에서 우리는 당신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지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먼저 당신이 스스로를 ‘번개’라고 이야기했는데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당신의 옷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충돌을 일으키면서 나오는 고압전류와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옷들을 보면 머리 속에서 뭔가 번쩍이지만 그런데 그것은 단지 번쩍일 뿐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당신의 옷들은 발전소에서 일반 가정으로 보내는 안정된 전류는 아니라는 겁니다. 어둡고 비 내리는 밤에 치는 번개는 순간을 환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곧 어둠이 오면 그 형체는 사라지죠. 당신의 옷들은 이처럼 번개처럼 시대정신을 순간적으로 보여 주고는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당신을 트러블 메이커로 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무엇보다 당신의 작품들은 ‘모호함’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스트 바스터’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까스텔바작 고스트 바스터라고 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역사에 있는 인물들을 불러 옵니다. 저는 그들을 찾아다니고, 그들의 창조성을 이 시대로 끌고 와서는 현재의 문화와 일치시키고자 합니다. 저는 역사의 인물을 유령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어렸을 때는 유령 이야기가 참 많았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죠.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이야기는 영화 속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저는 디지털 세상으로 인해서 우리의 원시적 감정이나 태고의 순수함을 많이 잃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런 진정한 감정을 다시 캐내고 싶습니다. 홍익대학교에서 강의할 때도 제가 그들에게 강조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자신 안에 있는 태고의 감정과 능력을 발휘하라는 것이었죠. 방금 말씀하신 ‘충돌’이라는 단어가 매우 좋군요. 충돌과 융합의 힘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을 결합시켰을 때 모호함이라는 에너지, 즉 새로운 이미지들이 나오게 만들거든요.

 

그것은 새로운 사고, 개념, 그리고 사상을 만들어 내죠. 한마디로 새로운 기호와 상징을 만들어 내는데, 그것이 바로 제가 하는 충돌과 융합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의 옷을 입는 계층은 전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교황에서부터 레이디 가가까지 그 스펙트럼이 매우 넓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제 안에는 늘 양립되는 극점들이 있기 때문이죠. 이 극과 극들이 연결되었을 때는 전에 보지 못하던 새로운 에너지가 나오게 되는 겁니다. 시간과 시간이 충돌하고, 아이디어와 아이디어가 충돌하고, 그리고 상품과 상품이 충돌해서 저는 전혀 다른 것들을 만들어 내고 싶은 거예요. 저는 특히 전통성이라는 극과 현대성이라는 극을 충돌시키려고 합니다. 그랬을 때 그것은 미래가 될 수 있겠지만 또 다른 현재가 되기도 합니다.

 

 

 

 

 

UB 그렇다면 패션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이러한 충돌이라는 방법을 사용합니까?
까스텔바작 예. 저는 제가 하는 모든 것에서 대부분 충돌과 융합이라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패션은 그 중의 하나일 뿐이죠. 음악, 공연, 그리고 건물 장식을 비롯한 제가 하는 작업의 방식은 모두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한 충돌입니다.

 

UB 그런 작업을 무려 40여 년 하셨습니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까스텔바작 가장 큰 것은 자기 자신을 믿는 것, 자기 내면의 힘을 믿는 것, 이것을 발견한 겁니다. 또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 그러니까 숙명이라고 믿고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UB 이번에 EXR 코리아와 함께 ‘리니에’라는 브랜드를 런칭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브랜드에는 지금까지 인터뷰를 통해 당신이 말한 그 모든 것이 들어가 있는 건가요?
까스텔바작 먼저 파리에서 활동하는 남자 디자이너 중에서 저처럼 생물학적인 아들이 있는 사람은 저 혼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무슨 말인 줄 아시겠죠? 이번에 런칭하는 리니에는 한마디로 프렌치 트래디셔널 스타일입니다. 1,000년의 역사를 가진 가문의 문화가 만들어낸 로고와 심볼을 보여 주는가 하면, 반대로 파리가 갖는 특유의 팝 아트를 접목시키죠. 이 브랜드는 1,000년 간의 우리 가문의 역사와 더불어 군인 집안이라는 내력, 그리고 나의 독특한 창조성과 아들의 창조성까지 모두 결합시킨 브랜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트래디셔널이 사립학교라면 리니에의 *프레피 룩(preppy look)은 군사사립학교라 할 수 있습니다. 브랜드의 내부 구조를 보면 더 재미있습니다.
 
이 브랜드를 이루는 주요 개념은 크게 세 개의 덩어리로 되어 있는데 첫 번째는 생(Sang, Blood)입니다. 이 부분은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보여줍니다. 피는 보이지 않지만 생명이 그 안에 있듯 이 브랜드의 생명을 말하는 겁니다.
 
두 번째는 에페(Epee, Sword)로, 귀족의 상징입니다. 이 브랜드는 프렌치 트래디셔널을 표방하지만 그 속에서 정통과 전통의 융합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는 까데(Cadet, Successor)로, 계승자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차별화된 아이템들과 스타일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새롭게 선보일 리니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인 프레피 룩(preppy look)이 아니라 Prepop(까스텔바작이 만든 신조어로 ‘문화에 앞선’이라는 뜻이다)을 보여줄 것입니다. 결국 이 브랜드 자체가 충돌과 융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UB 리니에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까스텔바작 저는 이 브랜드를 젊은이를 위한 ‘대중 럭셔리의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비싸야만 럭셔리가 아닙니다. 럭셔리는 말 그대로 ‘빛나야’ 합니다. 가격이 가치를 결정하는 게 아니거든요. 저는 리니에의 컨셉을 ‘The House of Brave’라고 정했습니다. 저는 이 브랜드를 통해 제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습니다. 저 역시 17세에 퇴학을 당한 그렇고 그런 젊은이에 불과했지만, 나의 가치를 믿었더니 오늘날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인터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혁명적인 브랜드를 만들고 싶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혁명이란 이런 뜻입니다. 지금까지는 제가 자처해 아방가르드한 상품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기업가 정신을 가진 디자이너가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장을 주도하는 혁신적인, 그러니까 혁명적인 일을 하고 싶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예전에는 저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주어 ‘우리들의’ 목소리를 만들고 싶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난번 인터뷰에서 말했던 것처럼 로마 교황청의 주문을 받아서 만들었던 그 옷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저는 지금 세상을 보다 아름답고 따뜻하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 브랜드를 만들고 있습니다. 거기에 저는 제 아들을 보면서 이 브랜드를 만들고 있습니다. 단지 팔릴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위한 옷을 만들 때 그 옷에 진정성을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제 아들인 루이 마리를 보면서 이 브랜드를 만들 때 이것은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내가 남길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브랜드는 개인의 상표이기보다는 시대와 국가의 유산이라고 생각하거든요.

 

UB 그럼 이제 루이 마리에게 물어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가 항상 당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 중에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세 가지 단어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루이 마리 하나는 크리스탈라이저(Cristalliser, 확고해지다, 결정체를 이루다)입니다. 이 단어는 스탕달이 만들어 낸 단어입니다. ‘표현하다, 완성시키다’라는 개념으로서 창조성과 동급의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싱크로나이저(Synchroniser, Synchronize: 동시성, 공시성)로, 칼 융이 만든 단어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운명적인 동시성을 파악하는 것이죠. 이것은 인생뿐만 아니라 패션과 새로운 창작품을 고안할 때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아주 작은 일에도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다는 삶의 태도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파티지(Partage, Sharing: 공유)입니다. 이것은 서로 공유함으로 인해 충돌과 융합이 기하급수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UB 다시 까스텔바작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평범함에서 비범함을 발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은 시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예술가이면서 시인인가요? 아니면 시인이면서 예술가인가요? 어떤 것이 더 우성인자인가요?
까스텔바작 아마도 예술가이면서 시인인 것 같습니다.

 

UB 그렇다면 어려운 청을 하나 해도 괜찮을까요? 당신에 관한 것을 주제로 즉흥시를 지어 줄 수 있을까요?
까스텔바작
Sur mon chemin
En marche vers demain
J'emporte mes souvenirs
En regardant l'avenir
J'emporte mes amis morts
Comme un trésor
La conquête pour donner
Dans ma quête d'aimer
내일로 내딛는
발걸음 그 길 위에
미래를 바라보며
나의 추억들을 품고 간다
보석을 든 듯이
나의 죽은 친구들을 품고 간다
내가 사랑을 추구함에 있어
쟁취하는 것은 베풀기 위함임을

 

UB 감사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두 가지 질문이 남았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당신이 누군가로부터 꼭 받아 보았으면 하는 질문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신 후, 그에 대한 대답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까스텔바작 (한동안 아무 말없이 땅을 보다가) 여태까지 가장 후회스러운 것, 가장 큰 후회가 될 만한 게 무엇인가를 저에게 질문해 보고 싶은데, 제가 답을 못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답이 없는 질문인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저의 큰 상처는, 멜랑꼴리(Melancholy, 비애)한 점은 제겐 큰 상처와 같아요. 그것 때문에 항상 많은 후회를 했지만, 반대로 또 그것 때문에 저의 창조 에너지가 나옵니다. 지금 저에게 한 이 질문은 인생의 답을 가지고 있는 질문이군요.

 

UB 마지막 질문입니다. 100년 뒤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 혹은 당신이 만든 브랜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를 한다면 어떤 말을 하고 싶습니까?
까스텔바작 <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는 “시간에게도 시간을 주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이 말이 요즘 세상의 아픔을 단적으로 보여주지 않나 싶습니다. 요즘 세상은 기술이 지배하고 돈에 의해 좌우되는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역사성 그리고 진정성이 무엇인가를 계속 질문하고 생각하면서 나아갔으면 합니다. 세상의 힘 앞에서 자신을 잃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창조적인 인문학자, 까스텔바작
인문학적 예술가, 까스텔바작

두 번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서 우리는 패션(의류)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하지 않았다. 이야기의 주제는 ‘창조’에 관한 ‘궁극의 목적’이었다. 이에 대한 답은 창조하는 그 자신이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데 있다. 자신을 “창조 에너지 덩어리”라고 말하는 까스텔바작을 보면서 생물학적 인간 이상의 가치를 느꼈다. 44년 동안 같은 생각을 하고 일관성 있게 행동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위대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돈이 되지 않아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생명력을 잃지 않기 위해 창조한다고 했다. 그래서 까스텔바작은 직업으로서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보다 예술가로서 전 영역에서 자신의 창조물을 만들었다. 생각할수록 그의 용기가 놀라웠다. 아마도 그래서 그는 ‘용기’과 ‘명예’를 이번에 런칭할 브랜드의 ‘피’로 만들겠다고 한 것이 아닐까.

 

 

 

 

장 샤를 드 까스텔바작
1949 : 11월 28일 Louis & Jeanne-Blanche de Catelbajac의 아들로 카사블랑카에서 태어나다
1968 : 그의 어머니가 프랑스의 리모주Limoges에 설립한 Ko & Co를 위해 첫 Collection 작업
1969 : 바닥 걸레, 스펀지, 방수포, 위장복 원단 등 생소한 소재들을 사용하여 첫 번째 쇼 발표
           Ko & Co에 겐조 다카다Kenzo Takada와 샹탈 토마스Chantal Thomass 고용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올림피아Olympia / 지미 페이지Jimmy Page의 깁슨Gibson과    
           Archet 공연 작업 진행
1973 : 앙드레 퓌망Andree Putman과 디디에 그랑박Didier Grumbach이 설립한 ‘Createurs et
           Industriels’ 합류
           Show futurism and protection manifesto : 붕대, protection nylons, micka visors
           Women Wear Daily 1면 : ‘The Courreges of the 70’s’
           Galleria Palace Show
1974 : Bourse du Commerce Show – 첫 번째 테디베어 코트, 2인용 판초
           로버트 말라발Robert Malaval과 공동 작업한 스키복
           Marche Saint-Honore 31번가에 첫 번째 Concept Store 오픈
           런던 London에서 말콤 맥라렌Malcolm McLaren과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
           와 조우
           파리Paris에서 뉴욕돌스New York Dolls와 까스텔바작 생일 콘서트 개최
           Contemporary Art Collection 데뷔
1976 : Destructed & POP Knitwear를 중심으로 이탈리아Italy에서 Iceberg Line 발표
           올리베로 토스카니Oliviero Toscani와 광고 캠페인 ‘The Contemporaries’ 시작
           막스마라MaxMara의 스포트막스Sportmax 라인 디자인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의 ‘Chalet du Lac’ 공연
1982 : 장 샤를 블리아Jean-Charles Blias, 로베르 콩바스Robert Combas, 룰루 피카소Loulou    
           Picasso, 벤Ben, 아네트 메사제
           Annette Messager, 제라르드 가루스트Gerard Garouste, 에르베 디 로자Herve Di Rosa,
           미겔
           바르셀로Miquel Barcelo 등의 작품으로 작업한 Printed Dresses 발표
1984 : 미키마우스에서 루이 16세까지 망라한 ‘Tribute Dresses’
           로버트 메이플소프Robert Mapplethrope, 신디 셔먼Cindy Sherman, 피터 후자Peter Hujar
           의 Pictures
           키스 해링Keith Haring, 장 미쉘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와 조우
1986 : K-Way와 공동 작업
           New York 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 전시회 개최
1988 : Vienna MAK에서 Anti Kopper 전시회 - ‘The Teddybear Coat’
1993 : Four Hands와 Collaboration
           앙드레 쿠레주Andre Courreges와 두 개의 Collection
1997 : 제12회 세계 기독청년의 날 파리Paris 행사를 위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성직자 5,500명
           의상 디자인
1999 : 파리 루 마담Paris Rue Madame 거리에 신진 디자이너들을 위한 컨셉 스토어 오픈
2000 : 유니크한 첫 번째 오뜨쿠뛰르 컬렉션 ‘Bellintelligenzia’
           남성복으로 복귀 ‘Presumed Innocent’
           ‘First Care’ Show
2001 : ‘DouDou’ 향수 런칭, Design Prize 수상
           로시뇰Rossignol, 르꼬끄 스포르티브Le Coq Sportif와 Co-branding 시작
           지하철역 프랑수아 미테랑Francois Mitterrand에서 ‘Emergency State’ Show
           남성복 ‘Frankenstein the Dandy’ Show
2002 : Guy Peellaert에 대한 헌정 Collection ‘Physical Graffiti’
2003 : ‘Sex and the City’의 사라 제시카 파커Sarah Jessica Parker 의상 디자인
2004 : 크리스티앙 기온Christian Ghion과 함께 파리Paris 보빌리에Vauvilliers 거리에 스튜디오 겸
           새로운 컨셉 스토어 오픈
           마레바 갈랑테르Mareva Galanter와 함께 첫 번째 단편영화 ‘Hotel Kittyfornia’ 제작
           Marchpole社 설립
2006 : 런던London, 빅토리아앨버트Victoria & Albert뮤지엄에서 ‘Popaganda, The Fashion Style of
           JC de Castelbajac’ 전시회 개최
           스칼리Scali가 편집한 판타지 소설 《Write Eneco》 출간
2007 : Paris Galleria Fashion 박물관에서 ‘Gallierock’ 전시회 개최
2008 : 런던London, Seville Raw에 Concept Store Open
           제8회 Athens Fashion Week에 Artistic Director로 선정
           Lee Cooper Jean Line Collaboration
           뉴 에라New Era와 모자 라인 Collaboration
           마레바 갈랑테르Mareva Galanter의 새 앨범 〈Happy Fiu〉 수록 7개 곡 작사
           Twenty Oil Paintings와 첫 번째 작품 전시회 작업
2009.10 : Ebony Bones와 라이브 협연 Show ‘Pirates! Parrots! And Paradise!’ 개최
2009.11 : POP Christmas를 위한 BHV와 Drugstore의 Art Director
2010.03 : French Horn Rebellion과 라이브 협연 쇼 ‘Go! Go! Go! Diva’ 개최
2010.04 : 런던London, 셀프리지스Selfridges 백화점 Window ‘An Encounter of the Fifth Kind’ Art  
               Director
2010.09 : 파리Paris, La B.A.N.K. Gallery의 첫 전시회 ‘Tyranny of Beauty’ 개최
               JCDC On-line Store 오픈
2010.10 : The Shoes가 라이브 협연한 Show ‘Uber Tropikal Airlines’ 개최
1988 :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수여
1994 :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수여로 작위 받음
2002 : 프랑스 레종훈장 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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